
외롭고 싫었던 서울생활을 접다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난 그는 교직에 몸담고 있던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곳곳에서 살았다. 평창과 강릉, 홍천 등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는 꼬박 3년을 홍천에서 다녔다. 대학을 서울에 있는 사립 명문대에 진학했지만 그에게 서울은 너무 외롭고 큰 도시였다. “당시는 대학을 간다는 것, 그것도 사립대학을 서울로 갈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었어요. 엄청난 기득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서울은 정말 나에게 외롭고 큰 도시였던 겁니다. 대학교 1학년 때 내가 왜 서울로 왔을까 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1학기는 정말 집과 강의실만 왔다 갔다 했어요. 적응하는데 굉장히 외로웠고 서울이 싫다는 생각까지 들었죠. 성격이 사람을 가리거나 주눅이 들거나 하지 않는데 그래도 서울은 너무 크고 외로웠어요.”
연세대학교 4학년이던 1987년 여름, 그는 누구보다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대학시절은 학생회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나름 양심 있는 지식인이고 싶었던 청년기였다. 하지만 1987년 여름이 지나고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그가 생각했었던 ‘좀 더 좋은 세상’에 대한 기대감을 무너뜨렸다. “1987년 6월이 지나고도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선돼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때 고향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전공이 아동학이니 전공을 살려서 새로운 희망을 만드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때도 산동네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한참 많을 때였는데 춘천 YMCA에서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과 사무실로 추천서가 온 겁니다. 아기스포츠단 교사를 채용하는 것이었는데 그때 무조건 춘천 YMCA에 온 것이 YMCA에서 30년 인생을 살게 된 계기가 된 셈이네요.”
자립하는 삶을 꿈꾸다 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면서 그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자립하는 인간, 자립하는 삶’에 대한 고민이 대부분이었다.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의식적으로도 독립할 수 있는 온전한 자기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었다. 취업을 못하면 파출부를 해서라도 내 삶을 꾸릴 것이라는 각오까지 돼 있었다. 당연히 결혼보다는 일이 우선이었다. 캠퍼스 커플로 사귀고 있던 지금의 남편에게 결혼보다는 일이 우선이라며 이별을 통보하기도 했다. 병에 걸린 아버지의 바람으로 다시 남편을 만나게 됐고 결혼까지 해 1남 1녀를 두었다. “나름 여성주의적 사회적 관점에 눈을 뜨고 있던 시기였어요. 결혼은 안하고 일 중심으로 살겠다며 이별을 통보했지요. ‘그래도 혹시 나중에 결혼을 해야 된다면 그때는 너하고 할 수 있어’라는 정도의 메시지를 남기고 헤어졌어요. 헤어지고 3개월 정도 지나 몸이 아픈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너는 다른 것 다 필요 없고 빨리 결혼 날짜부터 받아와’라고 말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의 남편에게 전화를 했지요. 결혼하자고. 연락도 안 받고 만나주지도 않던 사람이 결혼을 하자고 하니 놀랐을 겁니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했지요. ‘아버지가 아픈데 나보고 결혼하라는데 결혼할 사람이 너밖에 없어’ 라고요. 그래서 춘천에서 결혼을 하고 큰 아이를 낳았어요.

큰 아이를 낳고 나서 남편이 원주에 직장을 잡았어요. 그렇게 원주와 인연을 맺었고 원주 YMCA로 오게 되었어요.” 그렇게 원주 생활을 시작했고 원주 YMCA에서만 25년을 보냈다. 1988년 3월 춘천 YMCA에서 시작해 2017년 11월 원주 YMCA를 그만두기까지 꼬박 30년을 YMCA 안에 있었다. 일을 쉰 것은 아이를 낳고 두 달씩 출산휴가 받은 것이 유일하다. 청소년활동가로 현장에 있기 위해서 필요한 자격증을 취득하는데도 꽤 열심이었다. 아동학을 전공했으니 유치원 교사 자격증은 나왔다. 이후 청소년 지도사 1급, 사회복지사, 보육교사 자격증을 땄다. 모두가 사람과 관련된 교육과 돌봄 등에 대한 자격증이다.
국립평창청소년수련원 원장 수련원 원장 방 옆에 과거 부속실로 사용하던 곳은 이제 부속실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의 방은 늘 개방돼 있고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다. 모심을 받던 자리에서 모심을 실천하는 방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 그의 작은 소망 중 하나이기도 하다.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있을 때는 언제든지 그것을 내려 놓을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있어요. 이것이 신앙인의 마음이기도 하지요. 원장이라는 자리가 인사권도, 예산 편성권도 없어요. 모두 사무처 중심으로 결정되어지는 구조죠. 큰 방향을 제시할 수 있겠지만 공공기관이니 오랜 관행으로 촘촘하게 잘 짜여져 있어 일일이 개입할 일이 크게 없어요. 직원들에게 잘한다고 말해주거나 일하는 사람들에게 기운을 주는 것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입니다. 인사권이 없기는 하지만 조직을 운영하는 가장 기본은 ‘평평한 평창’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평화와 평등으로 한마음 되는 평창.’ 평평하다는 것은 가장 낮은 곳은 올려주고 높은 곳은 내려주는 것이니까요.” 현장에서 일을 한 그에게 국립평창청소년수련원 직원 선생님들은 어디에서 가치를 얻을까 궁금했다. 그래서인지 직원 선생님들에게 어떤 동력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현장에서 일할까라는 질문을 자주 했다. “내가 현장에서 활동할 때는 아이들을 만나고 그 만남에 변화와 성장이 있고, 그것이 희망이 되어 현장에 30년 동안 있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수련원은 아이들이 2박3일 정도 있다가 나가잖아요. 그렇다면 이곳 선생님들은 어디서 가치를 얻을까 궁금했지요. 이제는 그 궁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됐어요. 이곳 선생님들은 국립청소년수련원만의 프로그램 개발·보급 그리고 앞서가는 기획, 공공성 등에 굉장한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청소년 활동 업계에 최고의 공공기관이라는 것이죠. 그런 곳의 구성원으로 있는 것 자체가 자부심인 것 같아요. 또 예비 지도자들이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예비 지도자 연수 프로그램이 있는데 이곳에서 만난 친구들이 어느 날 청소년활동가로 있거나 청소년지도사로 만나기도 해요. 혹은 수련원의 같은 팀이 되기도 하더라구요. 지도자들끼리 성장하는 것이 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는 지금의 위치가 돈이나 자리로만 보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강조하기도 한다.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있을 때는 언제든지 그것을 내려 놓을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있어요. 이것이 신앙인의 마음이기도 하지요. 원장이라는 자리가 인사권도, 예산 편성권도 없어요. 모두 사무처 중심으로 결정되어지는 구조죠. 큰 방향을 제시할 수 있겠지만 공공기관이니 오랜 관행으로 촘촘하게 잘 짜여져 있어 일일이 개입할 일이 크게 없어요. 직원들에게 잘한다고 말해주거나 일하는 사람들에게 기운을 주는 것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입니다. 인사권이 없기는 하지만 조직을 운영하는 가장 기본은 ‘평평한 평창’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평화와 평등으로 한마음 되는 평창.’ 평평하다는 것은 가장 낮은 곳은 올려주고 높은 곳은 내려주는 것이니까요.”
아동·청소년과 어려운 여성을 위한 재단 설립의 꿈 청소년활동가로 평생을 살아 온 그의 꿈 중 하나는 아동·청소년과 어려운 여성을 지원하는 재단을 설립하는 것이다. “아동·청소년과 어려운 여성을 지원하는 재단을 만들면 좋겠다는 것이 버킷리스트에 들어있어요. 재단 설립이라고 하면 돈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고 많이 생각하잖아요.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났던 어린이들이 성장해서 그 아이들이 주인이 되는, 그 아이들이 지역사회에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사단법인을 함께 만들고 싶은 겁니다. 그 아이들과 말이죠. 지금도 춘천에서 일할 때 만난 아이들 5~6명은 계속 연락하고 있어요. 그때의 아이들에게 꿈을 꼭 이루고 성공을 해서 오라고 말합니다. 재단의 이사로 모실 수 있는 영광을 달라고 말이죠. 대답을 받아놓은 친구들도 제법 있답니다. 청소년활동가로 살면서 만났던 인연의 친구들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내면서 또 더불어 세상의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소망으로 이 일을 기쁘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나의 기쁨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젊은 세대를 만나는 것이 세대와 세대를 잇는 끈 같은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국립평창청소년수련원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 근무했던 원주 청소년수련관의 아이들과 마지막을 보내면서 지역에 남아주기를 당부했다. “지역에 대한 의미를 강조해 주고 왔어요. 지역에서 청년들이 공부하고, 지역에서 일하는 것이 좋은 것인데 왜 자꾸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느냐? 선택할 수 있다면 지역에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많이 해주었어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상징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글 원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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