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레포트


스토리 에세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10-22
첨부파일 올해_여름이_지나고_나면.jpg 조회수 1,246

올해 여름이 지나고 나면


살면서 이렇게 모질게 보낸 계절이 또 있었던가 싶다. 여행은 고사하고 집밖에 나가는 일조차 속편히 할 수 없다. 마스크가 고마우면서도 징글징글하다. 대체 언제쯤 맨얼굴로 외출할 수 있을까. 비는 또 왜 그리 내리는지. 며칠 방심한 사이 온갖 미생물의 서식지가 된 욕실을 박박 청소하며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타당하게 미워할 수 있는 건 병균과 자연 그리고 인류뿐이다. 자연재해! 미워! 병균! 나빴어! 인류! 이기적이야! 대상이 너무 거대하다보니 욕을 해도 어째 기운만 빠진다. 세상이 온통 증오로 가득 찬 기분이다. 서글프다.

평범함의 기준이 새롭게 정립되는 나날이다. 평소 건강관리에 별 관심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면역력 사수한답시고 눈에 불을 켠다. 디스토피아를 소재로 한 SF영화가 더 이상 흥미롭지 않다. 미세먼지 걱정을 했던 작년이 그리울 지경이다. 뭣보다 기약이 없다는 게 문제다. 이대로 버티면 언젠가 나아질 거란 믿음이 자꾸만 흔들린다. 

실체 없는 불안과 싸우다보면 인류는 미울지언정, 이상하게도 사람은 애틋해 진다. 일종의 전우애다. 언젠가 마스크가 없어 버스 승차거부를 당하는 동네 어르신의 모습을 본 뒤로 가방에 여분을 하나씩 챙겨갖고 다닌다. 여기엔 내가 곤란할 때 누군가 도와주길 바라는 보상심리 또한 작용했다. 이웃에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조차 모종의 계산이 전제된다. 이러나저러나 이게 다 코로나 때문이다. 
아침저녁 창문으로 드나드는 바람이 제법 차다. 세상은 아직 그대로인데 어느새 여름이 저만치 흘​러간다. 풀벌레가 길섶에 숨어 태연히 소리 높이는 걸 듣고 있자면 잠시나마 평화가 찾아온다. 여름만 지나봐라 이를 갈았는데 어째 막상 보내자니 서운하다. 징그럽게 속 썩이는 자식이 제일 아픈 손가락이라더니 딱 그 짝이다. 망쳐버린 수능, 흑역사로 남은 첫사랑과 더불어 두고두고 올해 여름을 아프게 회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종종 방구석 모퉁이에 거미가 집을 짓는다. 사람 입장에선 그저 성가실 뿐인지라 별 생각 없이 빗자루로 쓸어내곤 하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거미 입장에선 엄청난 재난이지 싶다. 혼신의 힘을 기울인 공든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셈이다. 그러나 철거를 단행하고 며칠 후에 보면 어김없이 같은 자리에 또 거미줄이 생겨있다. 해당 거미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럴 때마다 숙연해진다. 연속된 실패에도 노력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 외엔 다른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다. 절망과 싸우는 방법은 거미나 인간이나 매한가진가 보다. 

희망은 작고 희미해서 가끔은 안간힘을 써야 보인다. 언젠가는 이 모든 괴로운 순간들이 그럭저럭 곱씹을만한 추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그 때 참 어이없었지’하고 허허실실 웃을 수 있기를. 이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다시 겨울을 맞이하며 우리 삶이 더 많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먼 훗날 후손들이 2020년을 어떻게 평가할지 자못 궁금하다. 너무 박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글 황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