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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만나는 옛이야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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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 명기 황진이의 시조에 등장하는 벽계수 이종숙 묘소가 있는 벽계수길에는 옛 이야기가 풍성하다. 벽계수길 고개를 넘어가면 돼니마을과 100년을 훌쩍 뛰어넘은 천주교 대안리 공소, 연개소문의 발자국이라고 전해지는 장수발 자국 표지석이 기다리고 있다. 덕망 높은 해삼의 안타까운 사연도 만날 수 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국도 42호선을 따라 원주에서 문막 방면으로 가다보면 동화골 삼거리에 이른다. 동화골길로 접어들어 천천히 걷다보면 동화사의 천년 묵은 빈대와 큰 스님, 오동나무에 대한 전설을 만난. 원래 동화사 절터는 빈대의 소굴이었는데 큰 스님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절을 지었다. 하지만 천 년 묵은 빈대에게 큰 스님이 목숨을 잃자 절은 폐허가 되었고 오동나무도 점점 사라지게 됐다는 것. 잠시 동화사의 전설 속으로 빠진 뒤 다시 길을 나서면 솔향이 은은한 소나무 숲을 만난다. 동화수목원과의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발길을 돌리면 벽계수 묘역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벽계수가 누군가? 벽계수 이종숙(李終叔, 1508~?)의 호는 현옹(玄翁)이다.세종대왕의 증손으로, 조부는 영해군 이당(李瑭), 아버지는 길 안도정 이의(李義), 어머니는 부사 송자강의 딸 현부인 여산송씨다. 명선대부 벽계도정에 봉해졌고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묘는 경기도 시흥군 동면 봉천리 삼성산 간좌에 있었지만 원주시 문막읍 동화리로 이장했다. 벽계수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황진이다. 황진이의 시조에 그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청산리 벽계수(靑山裡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할 제 쉬어간들 어떠리.

 

벽계수는 사람들로부터 황진이의 재주와 미모가 뛰어나 많은 사람들이 만나기를 원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렇지만 자신은 기생 따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한다. 이 말을 들은 황진이가 벽계수의 사람됨을 시험하기 위해 그가 지나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위와 같은 시조를 읊었다고 한다. 시조를 읊는 황진이의 아름다운 모습에 놀란 벽계수가 타고 가던 나귀에서 떨어졌다는 것이다. 큰소리 친 것과는 다른 벽계수를 보고 실망한 황진이는 다시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출처 구수훈(具樹勳) 이순록(二旬錄)

 

100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대안리 공소

 

벽계수 묘역을 지나면 본격적인 숲속 길이 시작된다. 비가 내린지 얼마 되지 않은 숲길은 습했다. 구불구불한 굽이길을 한참 오르다보면 돼니재라고도 부르는 임도 정상에 오른다. 느긋하게 삼림욕을 즐기며 걷다보면 멀리 백운산과 치악산의 봉우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규모 태양광 시설을 좌측에 두고 길을 따라가면 승안낚시터 입구에 도착한다. 승안낚시터 입구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면 작은 돼니교라는 다리 이름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승안동의 한글 이름은 돼니 마을이다. 마을 생김새가 쌀을 담는 되의 안쪽처럼 생겼다고 해서 되안이라고 부르던 것이 세월이 흐르며 줄어들어 돼니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승안동은 돼니의 한자 표기로 되 승()자에 편안할 안()자를 쓴다. 다시 큰 돼니교를 지나 비석거리에서 우측으로 돌담이 예쁜 길을 따라 걷다보면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천주교 대안리 공소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한옥으로 조성된 대안리 공소는 1900~1906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역 교회사적 가치가 높고 1900년대 초 한옥 공소라는 희소성을 인정받아 2004년 근대문화유산 등록 문화재 제140호로 지정됐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공소가 설립된 것은 1892년이라고 한다. 원주에서 1892년 이전에 설립된 본당은 풍수원 본당 뿐이라고 하니, 대안리 공소의 유서 깊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주교였던 뮈텔(Muttel)의 일기에는 대안리 공소를 축성하던 날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다. 대안리 공소는 6·25 당시 인민군의 막사로, 전쟁이 끝난 후에는 미군이 구호물자를 나눠주는 배급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대안리 공소 느티나무 아래 대청마루에서 잠시 땀을 식힌 뒤 조금 걷다보면 벼가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 논길을 걸을 수 있다.

 

연개소문의 발자국과 해삼의 슬픈 사연

 

한참을 걷다보면 장수발자국 표지석이 보인다. 바로 연개소문의 발자국이라는 그곳이다. 1990년 발행된 원주군연감에는 이를 승안동 앞 2평 남짓한 넓은 반석에 길이 1자가 훨씬 넘는 발자국 모양의 흔적이 3개나 있어 주민들이 이를 장수발자국이라 부른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1999년 경지정리를 하며 장수발자국 바위는 1.5m 아래의 땅 속에 묻히게 됐다.

1975년 발행된 원주·원성향토지1999년 원주시가 발행한 원주의 지명유래에는 연개소문의 고향이 대안1리 장군터라는전설이 있다고 적고 있다. 장수발자국 표지석에서 우측으로 대안천을 따라 걷다가 갈림길에서 좌측, 하해삼교를 지나 대안로와 합쳐지는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해삼터에 도착한다.

해삼터도 옛 전설이 전해진다. 이곳에는 아주 옛날 해삼이라는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풍월을 좋아해 장안의 한량들을 불러 대접하고 시를 읊게 했다고 한다. 덕망이 높고 인품이 훌륭해 걸인들에게도 후하게 베풀곤 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밀려드는 손님들로 해삼의 아내는 죽을 맛이었다. 지나는 스님에게 집 앞의 능선을 끊으면 손님이 오지 않을 것이란 해결책을 듣고 실행에 옮기고 만다. 해삼의 아내는 스님 이 말해준 대로 머슴들을 시켜 집 앞의 고갯길을 끊었는데 그 자리에서 붉은 피가 솟아올랐다. 거짓말처럼 손님들의 발길은 뚝 끊겼지만 가세가 기울기 시작해 1년이 못 되어 집안이 망하게 됐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해삼의 아내는 연못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2015년부터 해삼터 마을에서는 피가 흘렀다는 그 고갯길 부근에서 해삼제를 지내고 있다. 해삼의 덕을 기리고 넋을 위로하며 마을의 안녕과 평화, 주민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기 위함이다.

천년 묵은 빈대부터 시작된 옛 이야기는 벽계수와 천주교 대안리 공소, 장수발자국, 그리고 해삼의 이야기를 끝으로 마무리된다. 그 길을 걸으며 때로는 벽계수가 되어 황진이를 만나기도하고, 또 어느 때는 삼국과 중국 땅에서 호령하는 연개소문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덕망 높은 해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만난다.

그 길에서 고구려와 조선, 대한민국의 격동기를 만나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 원상호